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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96

[에피소드] 밀짚모자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7월이면 움직이는 것조차 싫어진다. 나무 그늘이 있는 곳을 찾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소설책 한 권을 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그런데 현실은 뜨거운 뙤약볕과 마주해야 할 때가 많았다. 비가 오고 나면 한 뼘씩 크는 잡초와 땅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돌멩이들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배가 늘어난다. 일손 구하기 어려운 여름철에는 고사리손들까지 함께해야 한다. 아침을 먹고 나자마자 일은 시작이다. 해가 막 떠올라 그 열기는 대단하지 않지만, 머리 위까지 올라서면 그야말로 푹푹 찌는 날이 될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로 엄마는 토시와 수건을 꺼내주신다. 중무장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밀짚모자를 건네받는다. 얼굴을 다 감싸 안고도 남을 정도로 큰 모자다. 커다란 챙이 .. 2022. 7. 19.
[에피소드] 라벨을 떼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TV를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계속 나는 바람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페트병 찌그러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궁금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머니가 무언가를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무얼 하시나요?” 묻자 어머니는 몇 초간 뜸을 들인 후 대답을 해주셨다. “라벨을 떼고 있단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어제 먹었던 1.5l짜리 생수병이었다. 생수병이 라벨을 떼고 나니 투명한 페트병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머니께서 라벨을 꼼꼼하게 뗀 덕에 페트병이 말끔해 보였다. 이윽고 페트병을 발로 밟았다. 몰라보게 부피가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베란다로 가셨다. 나도 어머니가 가시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베란다 .. 2022. 6. 28.
[에피소드] 참외 노란 참외가 풍년인 듯싶다. 시장 곳곳에 노오란 참외가 가득하다. 하지만 참외를 집어 들기가 겁이 난다. 얼마 전, 맛있는 참외라며 “꼭 사드세요!”라는 장사꾼 말만 철썩 같이 믿고 비싼 값을 지불한 참외가 무보다 못한 맛을 낸 적이 있었다. 참외를 잘 고르는 법까지 유튜브를 보며 공부를 했건만 처참한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크기와 잘생긴 모양 하며, 겉으로 봐선 참외의 속을 들여다보기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모양과 맛으로 참외의 진면목을 판별했던 때가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과거의 잣대로 전락된 느낌이다. 참외의 맛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하면서 무작위로 참외를 집어 들고 즉석에서 깎아 참외의 맛을 홍보하던 때가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둘러봐도 수북하게 쌓아 놓은 참.. 2022. 6. 15.
[에피소드] 카네이션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꽃들이 피고 화려하게 활짝 핀다. 그렇게 많은 꽃들 중에서 5월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은 ‘카네이션’이다. 붉디붉은 꽃처럼 진한 사랑이 듬뿍 담긴 꽃이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한껏 표현할 수 있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도 고마움을 카네이션만큼 진실되게 전달하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생화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문방구에서 카네이션 모양을 한 조화를 사야만 했다. 5월이면, 문구점 앞은 카네이션 조화로 가득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딱히 표현할 방법을 몰랐던 시절이라 어버이날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용돈이 넉넉지 않아 좋은 선물과 카네이션을 함께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야 겨우 카네이.. 2022. 5. 31.
[에피소드] 부산 맛 기행 푸른 바다와 다채로운 음식이 기다리는 부산. 9시 5분에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초등학교 동기로, 러시아를 여행한 뒤로는 더욱 가까워져서 매달 서너 번은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전화를 할 때마다 회 먹으러 오라 간청했지만, 그동안 코로나를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찾아갔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공항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소 한 마리 해장국집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토렴을 해주어 밥알과 육수가 조화를 잘 이루었고, 숟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수하면서도 깔끔한 육수에 푸짐한 소고기와 선지가 주연이고, 대파가 마지막 느끼함마저 잡아주었다. 이번에는 자갈치시장으로 가는 길에 용두산 공원에 올랐다. 처음 대하는 부산타워에 올라 50년 사이 많이도 변.. 2022. 5. 19.
[에피소드] 근력 운동 집 가까이에 보건소가 문을 열었다. 이어 노인들에게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차일피일하다가 방문했더니 1개월 이내는 예약이 마감되었다고 했다. 혈당과 혈압은 정기적인 검진을 받기에 별 호기심이 없었지만 안 보던 기기로 근력을 측정한 직원과 마주했다. “어르신, 다른 수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만 근력 수치가 64점이라 평균치에 미달입니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줄넘기, 팔굽혀 펴기, 자전거 타기, 아령 들기 등을 추천 드립니다.” 불현듯 집안 아저씨가 떠올랐다. 팔십육세인 그 분은 신수가 훤했다. 집에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를 구비해두고 매일 두 시간씩 근력 운동을 한다고 자랑이시다. 팔뚝에 힘을 주니 알통이 30대 청년처럼 오르내린다. 건강미가 있어 보이고 나보다 젊어 보였.. 2022.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