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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별들의 시간

by 에디터's 2022. 5. 11.

사진출처: 크라우드픽

두 시간째, 이불 속에서 도토리 알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연거푸 하품이 터지고 있는데도 잠은 현관 밖으로 달아나버린 지 한참 전, 머릿속은 마당의 몇 줄기 찬 바람이 밀고 들어와 씻긴 듯 점점 명료해져만 갔다.

 

저녁 먹는 중에 틀어놓은 TV 정치토론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밥상에까지 건너온 토론 중의 몇 마디가 귀에 거슬려, 쓸데없이 사견을 붙이다가 급기야 방향이 다른 저 남자와 침 튀기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말았다.
거실에서 방으로 요리조리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 다니다가 읽던 책을 덮고 머리맡 스탠드까지 끄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돌아눕거나 부스럭대는 소리, 이어폰을 끼고 뭔가 들었다가 말았다가 끙끙거리는 소리, 서로 잠 못 들고 몸을 굴리다가 결국은 내가 못 견디고 일어나 버렸다. 속 좁은 모습들이 냉장고 속에서 며칠째 시들어가는 시금치 다발 같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안방 싸움은 점점 언제 끝날 줄 모르는 크리켓 경기를 닮아가고 있다. 야구나 축구처럼 화끈하게 한바탕 뛰고 마는 것이 나을 뻔했다. 리모컨으로 화면을 꺼버리듯 신경도 그렇게 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웃이나 결정 골 한 방이 없어서 연장전까지 오고 만 셈이다. 스타플레이어는 언감생심, 우리는 B급 선수도 못되었다.

 

커튼을 밀어보니 어두운 하늘에 밤톨만 한 별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안경 없이 실눈을 뜨고 보는 별이라 더 퍼져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저녁 먹기 전, 중천에 떠 있던 초사흘 달이 이미 뒷산을 넘어가 버려 뒤뜰은 그야말로 칠흑이었다.
문을 조용히 열고 베란다로 나왔다. 시드니의 5월은 늦가을이라 맨발에 닿는 나무 바닥이 몹시 차가웠다. 밤이슬에 축축해진 베란다를 걸어 나와 밤하늘이 좀 더 넓게 보이는 쪽으로 갔다. 눈에 무엇이 쓰였는지 주먹만 한 별들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어떤 별들은 주먹보다도 더 커 보였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 망연히 서 있으니 덤터기를 쓴 것 같은 언짢은 마음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날이 섰던 감정들도 슬렁슬렁 풀리는가 싶더니 잠옷 속을 파고드는 소슬바람에 남은 몇 가닥만 휘청거렸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살라는 지천명이 지난 지 언제인데 난 왜 이 모양으로 심사가 자주 뒤틀리는 것일까. 발끈 화를 내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나의 태도 때문에 나도 저 남자도 불어 터진 라면 발이나 바람 빠진 타이어 꼴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다툼은 별거 아닌 사사로운 것에서 시작했으나 말미에 가보면 배추 속처럼 딱딱한 고갱이가 늘 숨어 있곤 했다. 발효가 잘되어야 김치든 식초든 먹을 만해질 텐데 시간이 갈수록 서로 무심해진 탓인지 뚜껑이 쉬이 열리거나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와락 쏟아버리곤 했다.
대부분 그랬겠지만 일면 부지한 사람들로 만나 가족나무를 이루고 양쪽 집안의 분위기와 습관을 이어받아, 평범하면서도 고유한 빛으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것이 때론 흐뭇하기도 했지만 오늘처럼 나무젓가락만도 못한 모습으로 부러질 때는, 사는 게 참 부질없다 싶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가 서로의 별을 찾아 역동적으로 만난 것이 사실이라 쳐도, 오랜 세월 동안 몸과 육신을 다 태워 이제 곧 가뭇없이 소멸할 텐데, 어떤 숙제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 남아있어서 낡은 밧줄 같은 자존심을 드러내며 곧잘 티격태격할까. 그 알 수 없는 길을 헤아려보았다.

 

석탄자루 성운, 작은곰자리, 북극성에 관한 이야기를 곧잘 해주던 젊었을 적 저 남자는 떠도는 별이나 다름없었다. 먼 나라를 항해할 때는 하늘길에서 좌표를 찾아 바닷길을 예측하기도 했다. 그 낯선 항구에 닿으면 화물을 내려주고는 새로운 짐을 싣고, 지중해 또 다른 나라로 떠나는 마도로스라 불리는, 그것이 저 남자의 직업이었다. 미래의 시간이 튼튼했던 그때의 그는, 하얀 사관 제복을 입은 어깨에 푸른 별이 내려앉아 몹시 반짝거렸을 것이다.
항해 중에 틈이 나면 외국 풍물을 자세히 적어 보내곤 했다. 다음 항차는 미주 뉴올리언스이며 그 담에는 카리브해 쪽으로 내려갈 것이라 하고, 또 어떤 때는 반대쪽에서 대서양으로 가기 위해 험한 마젤란 해협을 건너야 한다던 두툼한 사연들, 송출의 역군으로 종횡무진 세계의 바다를 떠다니면서도 매달 빠짐없이 소식을 보내주던 그는 참 멀리에 떠 있던 별이기도 했다. 한두 달 후면 집에 돌아갈 것이니 몸조심하라던 애틋한 말들은 색 바랜 편지지에 묻혀버린 그리운 별빛들이 되고 만 것일까.
길고도 먼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떠났던 그 진국 같은 시간들은 집 한 칸 마련하자는 애들 어렸을 적 목표이기도 했지만 가장의 옹골진 책임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귀국 날짜가 가까워지면 가족들 선물을 챙기고 키우던 물 나무에게도 들뜬 마음을 건넸을 것이다, 더러워진 신발을 빨고 옷들도 차근차근 개어 가방에 미리 담아 두기도 했을 것이다. 일 년씩 홀로 견딘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근육을 만져보거나 또는 면도를 하면서 휘파람을 불지 않았을까. 묵혀둔 마음들이 하나둘 어둠을 뚫고 나가 별빛에 걸터앉기 시작했다.
암흑 속 석탄자루 쪽에서 별이 또 하나 길게 꼬리를 물었다. 무사히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빌었던 그 시절 그 별 같았다. 어쩌면 그 소원들이 땅에 떨어져 우리 꽃밭에 꽃들이 저리 지천으로 핀 건 아닐까. 지나온 흔적 속에 저 남자와 내가 하늘에 쌓아둔 그 숱한 기도처럼 말이다.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방에서 뭘 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서 TV를 켜놓고 방바닥에 상을 펴고 엎드려서 뭔가 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묵은 시간을 퍼오듯 저 남자도 그러고 있을까. 텔레파시가 운 좋게 적중한 적도 있었지.
차분해졌다. 저쪽도 곧 그러리라 믿었다. 굽은 등을 펴면서 헛기침으로 슬쩍 신호를 주겠지. 젊은 시절 마당에 나와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그 야심한 밤처럼 오늘 밤도 별빛에 스친 나는 둥그레졌다. 그러다 주먹별처럼 어깨를 부르르 떨며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져주기로 마음만 먹으면 그도 세상에서 늘 겸손한 승자가 될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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