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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뽀얀 국물

by 앰코인스토리.. 2022. 12. 29.

사진출처 : 크라우드 픽

겨울에는 뼈를 푹 고아 진한 국물 한 사발을 먹어야 힘이 난다며 옆집 아저씨가 잡뼈 몇 개를 나누어 주셨다. 사골이나 족을 사려고 했는데 가격이 많이 올랐다며 그보다 저렴한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사골에는 못 미치지만 잡뼈 역시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만 받겠다고 몇 번을 거절했지만, 아저씨는 한사코 내 손에 뼈가 담긴 봉투를 쥐여 주셨다. 이웃은 콩 반쪽 나누는 사이라는 평소 지론을 다시 한번 피력하셨다.

 

참 오랜만에 해보는 일이라 우왕좌왕의 연속이었다. 엄마라도 곁에 계시면 물어보던지, 아니면 엄마가 하시는 것을 지켜볼 텐데 엄마는 누나네로 놀러 가신 터라 내 스스로 해야만 되는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냉동실에 밀어놓고 엄마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서 옆집 아저씨를 만난다면 “뼈 잘 고아 먹었어?”하고 물어보실 텐데 거짓으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도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터넷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여기저기 친절하게도 뼈의 손질법부터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그 글을 보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을뿐더러 예전에 사골이며 우족이며 몇 번 삶았던 기억도 함께 소환되었다. ‘그래. 피를 빼야 했었지!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 혼잣말까지 섞어가며 일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다음날 냄비 안에 담긴 물을 버리고 뼈도 깨끗하게 씻었다. 손이 미끈거렸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뼈에 남아 있던 기름 때문인 것 같다. 빨리 비누로 싹 씻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꼭 이런 수고를 들여 뼈 국물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센 불에 들통을 올렸다. 한참 고아야 하기 때문에 들통이 좋다고 했다. 예전에 부모님도 사골을 고을 때 커다란 들통을 사용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끓기 시작하면 물을 한번 버리고 다시 받아서 끓여내야 한다고 했다. 쌀을 씻을 때 나오는 쌀뜨물도 처음에는 그냥 버리고 그다음부터 사용해야 한다고 엄마는 얘기해주신 적이 있었다. 불순물이나 독의 제거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뚜껑을 열어 들통 안을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센 불이다 보니 수위가 금방 낮아졌다. 한 시간을 더 끓이면 수위는 지금의 반으로 줄어들 것 같았다. 그래서 물을 보충했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 들통 안에 집어넣었다. 팔팔 끓던 물이 다시 조용해졌다. 사골 국물의 뽀얀 빛깔과는 아직 거리는 멀어 보였다.

두 시간이 지나고 나자 다시 통 안을 들여다보였다. 안경에 김이 서려 국물의 색깔을 구별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 물 색깔을 들여다보았지만 여전히 뽀얀 색은 아니었다. 팔팔 끓였는데 이리 더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시작은 했으니 끝은 봐야 할 텐데 자신감은 점점 떨어졌다.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성은 들어갔는데 결과물은 나오지 않으니 마음만 급해지고 있었다. 세 시간 이상 끓이면 된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다섯 시간을 고아야 뽀얀 국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무게를 더 둘 수밖에 없었다.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봄과 여름의 시간이 필요하듯 뽀얀 사골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네 시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색깔이 변해갔다. 마술과 같았다. 아니, 투명한 물 위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들통 안은 뽀얀 색깔로 가득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 불안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뽀얀 사골 국물 한 사발에 소금 간만 살짝 하고 마셔 보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내내 고소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다시 추운 날이 올 거라고 한다.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긴 뼈 국물로 올겨울을 씩씩하게 이겨 내야겠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