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찬의 시 <보릿고개> 중에서
가족 모두가 울고 있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아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하늘이 ‘한 알의 보리 알’로 보인다고 했다. 배고픈 아이가 넘어야 할 고개는 에베레스트산만큼 높아 보인다.
보릿고개는 가난했던 시절, 우리가 넘었던 눈물겨운 삶의 고개다. 보리가 누릇누릇 익어 가는 5월에서 6월쯤이면 대부분의 농가는 쌀독이 비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보릿고개를 춘궁기라고 했다.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한 해를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쌀독이 비니, 봄나물을 뜯어 죽을 쑤어 먹거나 풋보리를 베어 알갱이를 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보리를 수확해도 꽁보리밥조차 배불리 먹기가 어려웠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배가 불룩 나오고, 어른들은 살가죽이 누렇게 변하여 부어오르는 부황에 걸렸다. 그땐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고 배가 불룩 튀어나오면 건강과 부의 상징처럼 여기기도 했다.
보릿고개 시절의 간식이란 자연에서 얻는 열매가 대부분이다. 산딸기와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따먹거나 ‘밀 서리’로 허기를 달랬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주인 몰래 밀밭으로 들어간다. 밀 이삭을 잘라 모닥불에 구운 뒤 손바닥에 얹어놓고 비비면 밀알이 속살을 드러낸다. 껍질을 후후 불어내고 알맞게 익은 밀 알갱이를 먹으면 구수하고 달착지근하다. 생밀을 껌처럼 씹기도 했다. 검댕이 묻은 얼굴과 입술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웃다가 주인에게 들켜 혼쭐나게 도망가던 그때 그 시절의 아픔도 되돌아보니 추억이다.
쌀이 귀하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어머니는 보리쌀 위에 쌀을 조금 안쳐 할아버지와 나의 밥그릇에 흑백의 조화가 드러날 만큼 쌀밥을 섞어 주었다. 저녁이면 텃밭에서 열무나 연한 상추를 뜯어와 씻은 뒤 물기를 털어 내고 소쿠리에 담아 밥상에 올려놓았다. 큰 그릇에 보리밥을 퍼 담아 그 위에 열무나 상추를 손으로 잘라서 얹고 애호박과 부추를 넣은 뒤 끓인 된장과 고추장, 들기름을 약간 넣어 쓱쓱 비벼 먹던 보리밥 맛이 어머니의 손맛처럼 그립다.
요즘은 보리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지 않아 보리쌀이 흔치 않을 뿐 아니라 웰빙 바람과 함께 꽁보리밥이 건강 별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니, 세상도 많이 변했다.
글 / 사외독자 양기호 님
'Community >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토에세이] 사랑하는 가족과의 여행 (0) | 2019.06.17 |
---|---|
[에피소드] 만남과 이별 (0) | 2019.06.13 |
[포토에세이] 어머님의 뒤뜰에는 (0) | 2019.06.10 |
[포토에세이] 여름 궁전 (1) | 2019.06.03 |
[포토에세이] 그 시절 벚꽃과 함께한 아련한 사랑을 기억하십니까? (0) | 2019.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