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김치들을 하느라 엄마는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셨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김치 양념을 넣고 빨간 고무 장갑을 낀 손으로 쓱쓱 버무리고 나면, 맛깔 나는 양념이 뚝딱하고 만들어졌다. 채 썰은 무,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다진 파, 설탕, 액젓 등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양념들이 빨갛게 하나의 옷으로 갈아입고 김치가 될 재료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렇게 절임 배추를 만나 배추 사이 사이로 스며 들면 걸작품 포기김치가 탄생한다.
엄마는 더 맛있게 한다고 철에 따라 굴을 사다 넣기도 했고, 어떤 때는 황새기젓을, 살이 통통 오른 새우젓을, 시원한 맛을 추가한다며 배나 사과를 갈아 넣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보니 익지 않은 김치도 그런대로 맛을 내기도 했지만 2~3일 숙성이 되고 나면 정말 단물 뚝뚝 떨어지는 김치가 식탁을 주름잡게 되었다. 하나 같이 엄마의 정성으로 탄생한 김치인 것이다.
포기김치를 해놓고 나시면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해 한 가지 김치로는 어렵다고 하시며 또 하나의 김치를 다시 시작하셨다. 바쁜 일과를 어떻게 그렇게 알뜰하게 활용하는지 곁에서 지켜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다.
엄마는 어느새 알타리 네다섯 단을 풀어 다듬기 시작하셨다. 알타리는 나름 손이 많이 갔다. 도와드린다고 작은 칼을 들고 옆에서 하나하나 다듬어 갈 때 엄마는 속도를 내어 나보다 훨씬 앞서곤 하셨다. 물에 씻고 절이고 몇 시간 지나면 다시 알타리 김치 만들기에 나서신다. 개량 컵으로 하나하나 수치를 맞춰도 이보다 맛이 나지는 않으리라.
대충 눈대중으로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새우젓, 설탕, 액젓, 간장들을 빠르게 넣으셨다. 달인은 감이라는 게 있다고들 하는데 엄마도 그 영역에 있는 사람 같았다. 꼼꼼하게 쓱쓱 비비고 나면 금방 김치 양념이 완성되었다. 알타리 무를 넣고 나니 고무대야 안이 수북해졌다. 뒤집고 다시 뒤집고를 반복하고 나면 먹음직스러운 알타리 김치가 완성되었다.
김치가 다 되고 나면 엄마는 ‘나의 솜씨를 맛보시오!’하는 것처럼 알타리무 잎사귀를 하나 뚝 떼어 나의 입에 넣어주곤 하셨다. “어떠니?” 서너 번 오물오물하다 보면 잘 조화된 양념의 맛이 미각을 자극한다. “정말 맛있어요!” 그러면 엄마는 환한 미소로 화답하셨다. 추워지는 한겨울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긴 김치들이 익어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엄마도 망설이는 김치가 하나 있다. 순무김치, 깍두기, 나박김치까지도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엄마였지만 갓김치는 늘 주저하셨다. 어쩌면 갓김치를 거의 볼 수 없는 지역이었고 갓 재배 농가도 없었던 곳이기에 수도권으로 이사하면서 우연히 마주친 갓김치에 선뜻 도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 엄마는 전통시장 반찬가게에서 갓김치를 사가지고 오셨다. 사실 나 역시도 갓김치는 생소했다. 시장에 아는 분이 갓김치도 맛있으니 한번 드셔 보라는 말에 500g 정도의 양을 사 오셨다고 했었다.
기다란 줄기가 정말 생소했다. 열무 모양도 아니었고, 잎이 넓적한 근대 모양도 아니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놓은 갓김치를 들고 엄마와 나는 입에 넣어 보았다. 약간은 짭조름한 맛에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싫지는 않았다. 갓김치가 이런 것이라는 처음 접해 본 것이다. 밥 한 술 뜨고 갓김치 한 조각을 올려 입에 넣어야 비로소 제 맛이 났다. 그냥 맨입으로 먹기에는 다소 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밥과 어우러지다 보니 간이 제대로 맞았다.
처음 도전은 늘 떨리고 긴장되고 흥분되기도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좋으면 새로운 신세계를 얻어가는 기분이 든다. 갓김치가 그랬다. 엄마도 만족하는 모습에 갓김치는 그 이후로도 우리의 사랑을 받으며 식탁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 갓김치에 도전하지는 않으셨다.
내가 봐도 그동안 만들어 오던 김치의 양념 맛과는 차이가 있었다. 엄마는 누군가에게 그 양념을 물어보고 갓김치를 시도하려고 노력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엄마를 김치의 달인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 어쩌면 갓김치로 인해 허점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셨으리라. 그러나 갓김치는 입맛이 떨어질 때쯤 되면 식탁에 올랐다. 엄마와 나는 밥 한 공기를 금세 비울 수 있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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